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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법에 통달하면 윤회(輪廻)는 없다.

작성자
admin
작성일
2021-07-18 11:14
조회
6
법에도 여러 뜻이 있고 사람에게도 온갖 기질이 있으므로 여러 방편을 세우지 않을 수 없다
-선가귀감-

주해(註解): 법이란 한 물건이고 사람이란 중생을 가리킨다. 법에는 '변하지 않는 것' 과 '인연을 따르는' 두 이치가 있고, 사람에게는 '단박 깨치는 이' 와 '저차 닦아야 하는 이' 의 두 기질이 있으므로 문자나 말로 가르치는 여러 방편이 필요하다. 이른 바 "공적인 일 에는 바늘 끝만큼도 용납할 수 없으나, 개인적인 정으로는 수레도 오고 간다." 고 하는 것이다.

중생이 비록 본래부터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천생으로 지혜의 눈이 없어서 윤회를 달게 받는다. 만일 세상에서 초월한 금칼이 아니라면 누가 이 무명의 두꺼운 껍질을 벗겨줄 것인가? 고생바다를 건너 즐거운 저편 기슭에 오르는 것은 모두 부처님의 크게 가엾이 여기는 은혜 덕분이다. 그러므로 한량없는 목숨을 바치더라도 그 은혜의 만분의 일도 갚을 수 없다.
'나'라는 생각이 있는 한 윤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새로 닦아나가는 이치를 널리 들어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의 깊은 은혜에 감사할 것을 말한 것이다.
사족(蛇足) 어떤 이가 와서 물었다. 불교의 핵심교리는 무아(無我)법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윤회설
(輪廻說)도 말한다. 무아와 윤회는 얼핏 모순되어 보인다.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할까? 내가 없다면, 과연 윤회하는 주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무아법에 통달하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무아에 통달하지 못했기에 윤회하는 것이다. '나'라고 하는 생각이 남아 있는 한 윤회를 면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생각이 근본이 돼 윤회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들에게 있어서 무아는 목표요, 윤회는 현실이다. 이것을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서로 다른 차원의 가르침을 동일선상에서 설명하려고 하니 무리가 따른다. 본래 무아(無我)였지만, '나'라는 한 생각이 일어남으로써 유아(有我)로서의 삶이 펼쳐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라는 생각은 어떻게 일어나게 될까?

'할(喝)!!' "바람도 없는데 물결이 일어났도다."
이미 일어난 물결이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가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잠재우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물결이 쉬면 왜 일어났는지도 자연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법신불(法身佛)이 몸을 나투어 보신불(報身佛)과 화신불(化身佛)로 다가오신 것이다.
법신불인 본마음 참 나는 모양 그릴 수 없고 이름 지을 길 없는 자리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모양으로도 나툴 수 있고 어떠한 이름으로도 부를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바로 알아차리는 이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이가 많다. 그래서 결국 몸으로 나투신 부처님이 화신불이다. 중생들을 건지기 위해서 직접 마음과 몸으로 나투신 부처님의 은혜는 참으로 백골난망이다. 부처님이 안오셨다면 지금 어느 지옥에서 헤메고 있을까?